소쩍새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영화를 보다가 그냥 흘러간 대사였다.
근데
왜일까
자꾸만 거울 속의 내 자신이 보인다.

빠지라는 뱃살은 그대론데
자꾸 야위어지는 지갑은
냉장고속 비웃고 있는 김치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만 있고

탈탈탈
캐리어에 든 두유는 어느새
터져버려
헨젤과 그레텔마냥
나의 발자욱을 남기는데

뒤 돌아 볼 새 조차 없이
또 나는 갈림길에서
턱을 괴고 있다

저울질을 하는걸까
내 마음은 세모인데
입으로는 머리로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내 마음이 시키는 걸까
어디서 부터 먼저인지를
그 끝의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

시큼한 중독성있는
파스냄새는
어느새 발가락을 타고와
꽉 막힌 머리속을
더 어지럽힌다.

그래.
아직 일어난 일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말자.
행복한 고민에 대한
저울질은 하지 말자.

배부른데 헛 젓가락질 하다가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바꾸지 말자.

그렇게 호박전을 먹고
그렇게 국밥을 먹고
그렇게 만두를 먹고
그렇게 그렇게

먹는 것 밖에 모르는 영혼없는
도야지로 살지는 말자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

세상에는 참 별별 사람이 산다.
18살에 결혼해서 벌써 아들이 유치원을 다니는 친구부터
지지리 공부 에는 취미가 없다가 어엿한 베이커리 사장님이 된 친구,
세상을 지키는 멋진 강인한 여성 경찰이 되겠다며 고시촌에 들어간 친구
군대를 제대하고 제대로 살아보겠다며 학교로 돌아온 눈이 반짝반짝한 친구

각자의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인연이 산다.
오늘의 내가 겪는 일들은 너에게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릴수도 있다.
뭐하러 그렇게 힘들게 사나- 별일이네 소리에 묻혀지나갈 수 도 있는 너 와 나의 이야기.

유학.

이 두 음절의 단어는 나라는 사람의 정의 부터 싹 다 바꾸어 놓았다.

내가 이정도 였나
이래도 되나
할 수 있을까
어디론가 증발 하고 싶다
매일 들었던 생각이다.

스무살, 유학을 결심하고 일년간 준비를 했다.
과연 무엇을 위한 준비였을까. 기억속에는 영어 단어 암기와 미친듯이 연애 했던 기억 뿐이다.
아픔을 대비해 마실수 있는 술의 주량을 늘려주는 대학교 1학년 생활 이었을까.
드디어 집을 떠난다는 철없는 생각에 어린아이 물가에 내놓는 부모님 마음은 미쳐 헤아리지 못했다.
성공하겠다는 야망만을 가득 안고.

너무나 힘들었던 첫 육개월, 나는 많이 울었다.
김치가 너무 먹고싶었고 보글보글 끓인 라면이 너무 그리웠고
엄마가 아침마다 끓여주던 매운 순두부찌개가 먹고싶었다.
수능 영어도 백점 받은 나 인데-
학교에서 영어 잘 한다고 소문난 나였는데 –
과거 형이 된 나는 마치 헬렌켈러였다-보이지도 들리지도 말할수도 없는
나를 사랑해주겠다던 듬직하던 오빠는
나에게 눈웃음 치며 가시같은 손길로 인사하던 그 여자에게 아니라며 아니라며
가버렸다
그렇게 떠났다. 정 이 떨어진다고.
바보같이 왜 하나님과 만나고 싶다는 변명을 했는지 모르겠다.
설레는 마음은 내가 어쩔수 없다는 가혹한 현실을 나는
오히려 더 담담히 받아들였을 텐데.

인적없는 들판에 버려졌고
들개들에 먹히겠지
신데렐라처럼 물거품이 되고싶다는게
꿈이었다.

정신없던 더운날의 눈물로 목욕하던 여름이 지나고
하나 둘 수업에서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다
쿵짝 쿵짝 이 이런데 쓰이는 가
스케이트 보드 타는 스냅백 거꾸로 쓴 잘생긴 친구와
턱수염이 남성미를 자랑하듯 우람한 체구의 멋있는 친구와
그렇게 한 학기를 붙어 다녔다.
그렇게 2학년이 지나고 나는 국제학생회 회장이 되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지위의 변화 랄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야망 이라는 단어는 내 이름앞에 자연스럽게 어느순간 붙기 시작했다.
질투하는 무리들도 어느덧 생겨났고 중상모략도 당했고 나쁜년이 이름대신 붙기도 했지만
역시나 공적인 지위앞에서는 대놓고 욕하지 못하는 꺠갱 하는 모습에 피식 웃음도 낫다.
큰 무대에도 꾸준히 서고, 너무 바빠서 밥도 못먹고, 신문에도 나고, 미국아침방송에도 게스트로 나오고,
한숨 돌리면 밤 9시인, 그런 나날들이 지나자
학교 복도를 지나면 나를 알아보고 헤이 인사하는 친구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다시 눈을 뜨니 나는 4학년 졸업반이었다.
재수강은 없다는 쌍심지를 켠 마음으로 졸업논문을 쓰고
학부논문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국제 컨퍼런스를 하러 켄터키에 5일동안 수업빼먹고
per meal 당 $30 이나 지원해주는 빵빵한 프로그램 덕에 돈걱정 없이 에피타이저, 메인, 디저트까지 몸과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어느새 꽃다발을 들고 나는 울고있었다.

이 기쁜 날에
나는 교수님을 붙잡고 울었다.
나 떠나기 무섭다고
막상 아기다리고 고기다리던 날인데
집같은 이 곳을 어떻게 떠나냐고
학교는 나를 왜 붙잡지않느냐고

누군가 그랬다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간다고
활을 잡고 과녁을 조준할때는 시간이 천근만근 같지만
손을 놓는 순간 어느새 화살은 그 운명을 다 했다고.

3년반의 유학생활은
나를 애어른으로 만들었다
미시시피 강의 일부가 내 눈물일 만큼 펑펑 한달동안 쉬지 않고 울기도 했고
자면서도 울어서 아침에 눈이 붙어서 안떨어지기도 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10kg 이 쪗다가 빠졋다가 하고
영어로 말이 안통하는 수업에 쩔쩔매서 교수님 붙잡고 울고
이벤트 준비하다가 이기적인 팀원떄문에 고기썰던 칼 이 부르르 떨리기도 하고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와 있다.
내 지갑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고
마음의 찌르르 불안감은 원체
내몸의 일부 인 양꽁꽁 붙어있고
가지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은 많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길치 이다.
정해진 목표에 대한
불확실한 지도와 나침반
미안하지만
내 이십대 초반은 그렇게
스물 셋 가을을 지나고 있다.

나는 아직,

“어머니는 내 삶에 왜 그리 관심이 많으세요?”

열다섯 살 내동생은 이런 말을 종종 한다.

쪼그만게 밥 좀 먹었다고
떡볶이 같이 먹는 친구 좀 생겼다고
맹랑하게도 눈을 치켜뜨며 얘기를 한다.

열다섯 자기 인생에 제일 힘든건 자신인데
도데체 우리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냐는 거다.

그래 사실이다.
열 다섯 눈에는 열다섯이 아는 만큼
스물 네 살 눈에는 경험 한 만큼
그러다가 한 오십쯤 되면
또 그 살아온 만큼 보이겠지.

내가 보는 세상은 이십사년 살아온 꼭 그 만큼 만인데
머리 희끗한 사람이 와서
이봐- 세상은 니가 알고 있는게 다가 아니야
더 죽기살기로 아둥바둥 힘내서 이 곳을 떠나라고-.
오히려 겁에 질린 개구리는 편안하던 침대에서 마저
헉헉거리며 물에 빠져 익사 하지 않을까.

설령 지혜로운 은사의 말을 쫒아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우리 제다이의 용사들은
오늘 내 청춘을 바쳐 살아보자- 이런 약간은 바보같은,
답없는 의미라는 의미에서 시작 된 것일까.

무모한 용사.
나는 기로에 섰다.
이 길에서 저 길로
최종 목적지에 들어서 편히 쉬려는
나의 기차는 그 길을 찾으러
동쪽으로 가려다가
역풍을 만나 서쪽으로 가고
애꿎은 나침반에 눈물 흘리기도 한다.

너무나 큰 어른으로만 보이던
그 나이에 내가 도달했는데도
변한 건 없다.
실타래의 끝을 쥐고 여전히 달려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과 발자국은 끊임 없고
눈물 많았던 스무살은
여전히 지속되는 스물 네살의 느릿느릿 흘러가는 오후다.